걸어온 길

걸어온 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산대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할 때만 해도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서 사회 현상에 눈을 뜨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학교 공부보다는 사회운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중 인생에 있어 아주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며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학교 1년 선배가 투신 자살을 한 것.

그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91년 5월 명지대 1학년이던 강경대 씨가 시위도중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부산 지역에서 수만 명의 대학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선두에서 진두지휘하였다.

90년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자마자 수배의 몸이 됐고 검거를 피해 학교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역대 부산대 총학생회장 중 임기 동안 경찰에 잡히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94년 수배가 해제되고 학교에 복교하였고 마지막 학기중인 95년 10월에 학교 구내(학생회관앞)에서 결혼식을 하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95년 노 대통령이 부산시장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에 참여하면서 노 대통령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선거 유세가 벌어질 때마다 사전 연설에 나서 좌중의 관심을 모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어 보좌하게 된 계기는 98년 노 대통령이 종로 보궐 선거에 당선되어 비서로 일하게 되면서부터다.
98년에는 노무현 국회의원의 비서로, 
99년 1월부터는 수행비서로 발탁돼 당시 노무현 의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2000년 8월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임명 됐을 때 외부 인사로는 혼자만 발탁되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이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캠프에서 노 대통령의 의전을 담당했으며 2001년 10월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사고지구당 정비 과정에서 주위 선배들의 권유로 부모님이 거주하고 계신 양산지구당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부터 양산에서의 험난한 정치생활이 시작되었다.

민주당 내 최연소 지구당위원장으로 지역구와 중앙당을 오가며 당 개혁에 주력하였다.
지구당 위원장으로서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2004년 17대 총선에 첫 출마하여 1,000여표 차이로 아깝게 낙선하였다.

낙선후 대통령님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 행정관으로 발탁되어 비서관까지 승진하였다.
청와대 시절 한강이남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양산부산대학교 병원이 빠른 기간내에 완공되도록 지원하였고, 부산대 양산캠퍼스의 한의학전문대학원 유치를 위한 기안에 대통령님의 결재를 직접 받음으로써 양산 유치를 확정하게 되었다. 이후 국립대학병원에서는 유일하게 한방병원이 들어선다.

지역 감정과 지역 정치를 극복하겠다는 정치 입문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고 4번의 낙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15년간 활동하고 있다.